왜 우리는 다시 느리고 불편한 것을 선택할까

글 방연주 대중문화평론가

왜 우리는
다시 느리고
불편한 것을
선택할까

빠르고 편리한 AI·디지털 시대.
하지만 느리고 손에 잡히는 것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지금 시대가 선택한 ‘진짜 경험’은 무엇일까.

방연주 대중문화평론가

중년의 히라야마는 Perfect Days 속에서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돌며 하루를 보내는 청소부다. 도시 외곽의 허름한 맨션에 살며,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집 앞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를 들고 작은 승합차에 올라타면 그의 하루가 조용히 흘러간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느 순간 미묘하게 달라진다. 카 오디오에 카세트테이프를 밀어 넣는 순간, 그의 시간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의 흐름과는 다른 결을 띠기 시작한다.

기술 과잉 속 아날로그의 반격

0과 1의 데이터로 환원되는 디지털·AI 시대, 모든 것은 빠르게 흘러간다.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등 1분 남짓의 ‘숏폼’ 콘텐츠가 일상을 장악했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본방 사수’하던 드라마의 자리를 이제는 90초짜리 숏드라마가 대신하고 있다는 말도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음악 역시 다르지 않다. 음반에서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된 지금 우리는 앱을 터치하는 순간 원하는 곡을 재생할 수 있다. 빠르고 편리한 시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LP(바이닐 레코드판)를 꺼내 바늘을 올리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속도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느림의 시간을 선택하고 있다.

K팝 업계에서는 음원과 함께 LP를 발매하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보다 특별하게 소장하고 싶은 팬들의 마음이 더해지면서 옛 음반의 재발매는 물론 아이돌 가수들의 특별판 LP 출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BTS의 정규 앨범 LP 버전 역시 출시와 동시에 품절될 만큼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런 흐름은 국내 시장만의 특이한 현상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미국, 영국, 독일의 Z세대 응답자 가운데 87%가 LP 음악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LP를 직접 만져본 적 없는 세대가 LP를 구매하고 이를 ‘힙한 물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뉴트로 열풍과 맞물려 느림을 즐기고자 하는 감각이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색적인 공간도 등장했다. 1970~80년대 신청곡을 틀어주던 음악다방이 있었다면 이제는 도시의 빠른 리듬을 잠시 벗어나 오롯이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청음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내 손안의 휴대폰으로 모든 곡을 찾아 들을 수 있고, 취향에 맞는 음악을 자동으로 재생해주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는데도 말이다. 청음실의 형태도 다양하다. 턴테이블 위에서 LP가 돌아가는 공간부터 하이엔드 스피커와 정교한 음향 시스템을 갖춘 청음 공간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경험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보낸다.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경험이 목적이 된다.

이러한 흐름은 ‘텍스트힙(Text Hip)’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콘텐츠를 배속으로 소비하는 시대에 독립서점이 급부상하고, 종이책을 읽으며 활자에 깊이 몰입하는 행위가 하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소유함으로써 디지털 텍스트가 지니지 못한 ‘지적 아우라’를 누리려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장강명 작가는 AI 시대를 통찰한 『먼저 온 미래』에 이어 『살면서 한 번은 벽돌책』을 펴내기도 했다. 700쪽에 달하는 ‘벽돌책’을 읽으며, 쉽게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버텨내는 ‘경험’ 자체를 이야기한다. ‘텍스트힙’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방식인 동시에 빠르고 편리한 선택지가 있음에도 일부러 느리고 번거로운 과정을 택해 ‘경험의 밀도’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과거가 아니라, 검증된 형식

왜 우리는 과거를 찾을까.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이미 감각적으로 검증된 형식을 다시 호출하는 일에 가깝다. 레트로와 물성에 대한 선호가 손에 잡히는 경험을 통해 ‘진짜’를 확인하려는 흐름이라면, 대중문화에서는 그 욕구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 그 답은 ‘오리지널’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진다.

예능에서도 기술적 기교를 덜어낸 정통 포맷이 다시 주목받는다. 숏폼 콘텐츠가 일상을 점령한 가운데 ‘롱폼’ 토크쇼의 부활은 흥미롭다. 무대는 유튜브로 옮겨졌지만, 과거의 오리지널을 자연스레 끌어온다. 유튜브 채널 ‘뜬뜬’의 예능 <핑계고> 100회 특집은 1시간 54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공개 10여 일 만에 조회수 1천만 회를 돌파했다. 과거 토크쇼처럼 보이지만, 촘촘한 대본 대신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담’이 중심을 이룬다. 나영석 PD가 이끄는 채널 십오야의 <나불나불(와글와글)>, 가수 겸 작곡가 정재형이 토크와 음식을 함께 나누는 <요정식탁> 역시 과거 토크쇼의 형식을 오늘의 방식으로 되살린 사례다.

드라마 콘텐츠에서도 흐름은 이어진다. ‘오리지널’의 리메이크가 하나의 경향처럼 자리 잡고 있다. 1970년대 한국형 수사물의 시초라 할 <수사반장>은 프리퀄 드라마 MBC <수사반장 1958>로 돌아왔고, 국내 최초 SF 스릴러로 평균 시청률 38%를 기록한 MBC (1994)은 <M: 리부트>로 재탄생을 앞두고 있다. ‘한류 드라마’의 상징과도 같은 MBC <대장금>(2003) 역시 리메이크가 확정됐다. 의녀가 된 서장금의 일대기를 다룬 <의녀 대장금>은 주연 이영애가 출연을 결정했고, 하반기 촬영을 준비 중이다. 윤은혜·주지훈 주연의 MBC <궁>(2006)도 리메이크를 앞두고 있다. 이렇듯 추억의 드라마를 다시 불러내는 움직임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대중음악에서의 ‘오리지널 찾기’는 보다 감각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뉴진스는 1990년대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오래된 미래’를 제시했다. 데뷔곡으로 멜론 차트 1위에 오른 걸그룹이 6년 만이었다는 점도 의미 있지만, 인상적인 것은 그 반응의 결이다. 이들의 음악은 199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향수를, 그렇지 않은 세대에게는 ‘낯선 신선함’을 안기며 세대를 가로지르는 오리지널리티의 힘을 보여줬다. 문학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한로로와 최유리의 음악 역시 실제 악기 연주와 서정성을 통해 ‘손으로 쓴 음악’의 가치를 환기한다. 사람들이 과거의 형식에 다시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감정적으로 검증된 서사는 유통기한이 없어서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복고를 넘어 오늘날 ‘오리지널리티’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를 다시 묻는다.

ⓒ MBC 드라마 ‘궁’ 포스터

AI 시대, 오리지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AI가 단 몇 초 만에 이미지와 문장을 생성하는 시대, ‘오리지널리티’의 기준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 얼마나 완성도 높은가보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가에 가까워 보인다. 무한한 복제와 생성이 가능한 환경에서 대중은 결과 자체보다 그 이면의 맥락과 시간을 함께 소비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정점으로 향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변화는 콘텐츠의 만듦새에서도 읽힌다. 앞서 언급한 나영석 PD의 유튜브 콘텐츠는 화려한 편집이나 정교한 연출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 뒤 스태프와의 대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의 반응, 길게 이어지는 사담까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완성된 결과물을 보여주기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공유하는 데 가깝다. 과거 방송 문법이라면 ‘편집 당할’ 장면들이 핵심이 되는 셈이다. ‘무엇을 보여주느냐’보다 ‘어떻게 흘러가는가’가 콘텐츠의 힘으로 작동한다.

대중음악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가수 AKMU가 발표한 앨범 <개화>는 음악 그 자체뿐 아니라 그 음악이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소비된다. 이수현이 슬럼프를 겪고 다시 무대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 알려지면서 곡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시간의 기록처럼 받아들여진다. 듣기 좋은 멜로디나 완성도 높은 사운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층위가 생겨나는 것이다. ‘왜 이 노래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결과물 바깥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가 김애란은 AI와 인간의 차이를 “망설임”이라고 말했다. 대중은 결과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망설임, 선택의 흔적까지 함께 읽어내며 ‘진짜’를 가늠한다. 결국 오늘날의 오리지널리티는 흔들림과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진 과정에서 깊은 공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손에 잡히는 물성을 찾고, 오래된 형식을 다시 불러오며, 누군가의 시간을 통과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이 있음에도 일부러 시간을 들여 ‘감각을 통과하는 경험’을 택한다. 그렇게 쌓인 시간과 감각이 깃든 곳에서 우리는 오래 머문다.

어둑한 저녁, 히라야마는 카 오디오에 카세트테이프를 ‘딸깍’ 밀어 넣고 운전대를 잡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수 Nina Simone의 ‘Feeling Good’이 흘러나온다.

“And this old world is a new world(이 오래된 세상이 내겐 새로운 세상이야)

And a bold world, for me(그리고 대담한 세상이지, 나에게는)”

<화분> Vol.70

에디터 ***

포토그래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