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풍경 속, 투명한 유리로 새겨낸 삶의 문장들

화성예술지원 선정자 용하현 작가

사라져가는 풍경 속,
투명한 유리로 새겨낸 삶의 문장들

화성예술지원 선정자 용하현 작가

도시의 재구조화 속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공간들. 그 안에 남겨진 장소와 주민의
기억을 붙잡아 아카이빙하는 예술가가 있다. 회화, 사진, 설치를 넘어 유리까지, 다양한 매체로
시간의 흔적을 구조화하는 작업. 용하현 작가는 평범한 ‘사람 사는 이야기’에 가치를 둔다.
오는 9월, 또 한 번 시공간을 탐색하는 몰입형 전시를 앞둔 그를 만났다.

백미희(편집실)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작가님과 화성이라는 도시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화성은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님이 사시던 곳으로, 변화의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 작업의 출발점입니다. 지금은 공장 단지와 도로가 들어선 안녕동이 과거에는 ‘안녕리’라 불리던 시골 마을이었죠. 동네 입구에는 정승이 서 있었고, 비포장도로 위로 젖소들이 다니던 풍경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급격한 재구조화 과정을 직접 목격하면서, 사라지는 공간과 그 안에 남은 주민들의 서사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주 매체인 ‘유리’는 참 매력적인 재료입니다. ‘투명한 유리’ 자체의 물성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유리는 투명하지만 쉽게 변치 않는 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투명함에 집중하는 이유는 장소가 지닌 ‘기억의 주관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옛 간판이나 공간은 모두 누군가의 기억이 깃든 장소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따뜻한 추억일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쓸쓸한 기억일 수도 있듯 감정의 색깔은 저마다 다릅니다. 만약 작품에 특정 색을 고정해 버리면 관람객에게 직관적이고 한정된 상상만을 제시하게 됩니다. 반면 색을 비워 둔 투명한 유리는, 작품 너머를 바라보며 각자의 기억과 감정의 색을 자유롭게 투영할 수 있는 여백과 확장성을 만들어 줍니다.

 

현장에서 수집한 소스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기까지, 구체적인 작업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재개발 구역이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장소를 찾아가 아카이빙과 리서치를 진행합니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담긴 간판을 촬영하고 수집하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이후 이미지를 작업 크기에 맞게 편집·출력해 커팅하고, 유리는 작품 크기에 맞게 재단해 가마에서 구워 냅니다. 여기에 현장에서 수집한 문틀이나 창틀을 수선해 결합하면서 하나의 작업으로 완성해 나갑니다.

 

유리를 중심으로 작업하시면서도 매체를 유연하게 확장하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향하시는 작업의 정체성이 궁금합니다.

저는 유리를 깊이 다루고 있지만, 스스로를 특정 장르에 가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주제와 서사’이며, 매체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작업의 본질은 도시 재구조화 속에서 사라지는 공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데 있습니다. 주민들의 삶이 겹겹이 쌓인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구조화하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이를 위해 유리뿐 아니라 드로잉,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장르의 경계를 나누기보다,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을 선택하고자 합니다.

울산, 전주 등 전국의 여러 지역을 오가며 아카이빙 작업을 이어오셨습니다. 각 지역에서 발견한 고유한 정서나 시대상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크게 보면 모든 지역이 ‘사람 냄새 나는 동네’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세부적인 결은 서로 다릅니다. 바닷가 바로 앞이었던 울산 장생포에서는 플라스틱에 밀려 사라져 가는 옛 ‘나무 어상자’를 수집해 작업에 활용했습니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우네’ 같은 고래고기 관련 단어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죠. 반면 곡창지대였던 전주는 넓은 들판과 활기찬 시장의 정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도심을 걷다 보면 다방, 이발소, 수선집, 비디오방 같은 아날로그 감성의 간판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런 파편들이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발로 뛰며 흔적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얽힌 인상 깊은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첫 본격 리서치 현장이었던 화성 우정읍의 ‘선창포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간척 사업으로 바다가 사라지고 들판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르신들이 어시장을 지키고 계신 묘한 장소였죠. 과거에는 제부도보다 훨씬 큰 장이 열렸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너무 적막해서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상인분들을 인터뷰하고 영상을 촬영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고요.

개인전 이후에는 그 공간에서 주민분들께 작품을 직접 보여 드리고 싶어, 어시장 옆 유휴 공간을 빌려 2024년에 전시를 열었습니다. 전시 공간이 아니다 보니 하루 종일 혼자 자리를 지켜야 했는데, 이모들이 지나다니며 꽃게, 사탕, 대추, 젓갈 등을 끊임없이 챙겨 주셨습니다. 그때의 따뜻한 마음과 풍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는 9월에 개최될 신작 전시 <어제가 그려낸 문장>(가제)은 어떤 연출로 꾸며질 예정인가요?

이번 전시는 그동안 수집해 온 문틀이나 창문틀, 그리고 유리 작업을 집대성하여 하나의 거대한 ‘몰입형 공간’으로 꾸미고자 합니다. 문틀과 창틀은 본래 ‘그 너머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이를 벽에 걸거나 파티션처럼 전시장 내부에 세워 관람객들이 공간을 이동하며 투명한 유리 너머의 풍경을 탐색하도록 유도할 계획입니다. 여기에 빛과 그림자를 세밀하게 제어하여 작품의 형상이 바닥과 벽면에 은은하게 비치도록 연출하려 합니다. 관람객이 그림자를 이정표 삼아 공간을 읽어 나가는 공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이와 더불어 번지고 흐르는 드로잉과 유리의 물성을 결합한 소품 형태의 새로운 표현 연구도 시도해 보는 중입니다.

 

지난 2023년부터 화성시문화관광재단이 운영하는 <화성예술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 지원을 받아오셨습니다. 이러한 공공 지원이 작업에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신진 작가에게 공공 지원은 창작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현실적인 기반이 됩니다. 특히 유리를 주 매체로 사용하는 제 경우, 그 필요성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유리는 가마 크기에 따라 작업 규모가 제한되고, 물리적 제약이 많아 다루기 까다로운 데다 재료비 부담도 큽니다. 초기에는 재료를 구입할 때마다 부담이 클 정도로, 새로운 시도를 위한 실험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자신만의 기법과 작업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데, 재단의 화성예술지원 프로그램은 그 과정을 안정적으로 이어 갈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실패에 대한 부담 없이 다양한 재료와 방식을 시도할 수 있었고, 작업의 확장도 가능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가마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전시 기회 역시 부담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원 덕분에 지난해에도 여러 신작을 제작하고 전시까지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문화예술 취약 지역에도 예술을 전하고 싶다”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하셨는데요. 지역 예술 지원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시나요?

현재 한국의 문화예술 인프라는 서울과 일부 신도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화성만 보더라도 동탄이나 병점을 중심으로 문화시설이 몰려 있고, 서남부권의 농어촌이나 공장 지역은 여전히 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렵죠. 작가들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도 이를 시민에게 보여 줄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은 늘 아쉬운 부분입니다.

예술은 작가 개인의 성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만나고 호흡하며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휴 공간을 찾아 전시를 시도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지역 예술 지원이 단순한 창작 지원을 넘어, 시민의 일상에 문화적 경험을 확장하는 역할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호의 주제는 <멀티 페르소나>입니다. 일상 속 ‘인간 용하현’과 현장을 누비는 ‘작가 용하현’의 삶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꽤 큰 차이가 있습니다.(웃음) 일상 속 저는 지독할 정도로 게으른 ‘집순이’에 가깝습니다. 스케줄이 없는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로 정해 두고, 온종일 쉬면서 에너지를 비워 내는 편입니다. 상당히 비계획적인 사람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가’로서의 페르소나가 작동하는 순간 완전히 달라집니다. 작업에 들어가면 최대한 계획적으로 움직이려 하고, 현장 리서치에서는 높은 기동력을 발휘합니다. 카메라와 스마트폰만 들고도 하루 종일 걸으며 공간을 기록합니다. 어쩌면 작업에서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쏟기 위해, 일상에서는 의도적으로 여백을 만들어 두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조망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작가님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제 작업이 거창한 메시지로 세상을 대단하게 바꿀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묵묵하게 우리 주변의 사소하고 평범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정성껏 전달하고 싶을 뿐입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제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만의 소중한 옛 기억과 향수를 따뜻하게 추억할 수 있다면 예술가로서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일 것 같습니다.

 

<어제가 그려낸 문장>(가제) 전시 정보

  1. 일시: 2026. 9. 2.(수) ~ 9. 8.(화)
  2. 장소: 화성열린문화예술공간 42 (화성시 동탄구 동탄대로5길 21 라크몽 B동 3층)

<화분>Vol. 71

에디터 백미희(편집실)

포토그래퍼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