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툰_글·그림 언널브(@un.nerve)
글·그림 언널브(@un.nerve)
우리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직장에서는 회사원, 집에서는 가족, 누군가에겐 친구.
그리고 때론 그 어떤 모습보다 더 깊이 몰두하는,
자신만의 또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3년 전쯤, 남동생과 나는 함께 스쿼시를 배웠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목 통증 때문에 그만두었지만,
동생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스쿼시를 하고 있다.
회사원인 동생이 퇴근 후 사무실을 나서는 모습을 떠올리면
여느 직장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집이 아닌 스쿼시장으로 향하는 저녁,
마우스가 아닌 라켓을 쥔 순간 동생의 하루는 다시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취미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동생은 주말에는 공식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스쿼시에 진심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에너지를 쏟고도,
또 다른 땀을 흘리러 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동생은 스쿼시를 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도, 쌓여 있던 불안도, 내일에 대한 걱정도
잠시 벤치 위에 내려놓은 뒤 코트 안으로 들어간다.
신경써야 하는 것은 벽에 부딪혀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작은 공 하나뿐.
낮 시간 내내 의자에 앉아 모니터만 바라보던 회사원은 없고,
발꿈치가 땅에 붙어있을 새 없이 분주한 선수만이 남아있다.
동생은 스쿼시를 시작한 뒤 집중력이 좋아졌다고 자랑했지만,
무엇보다 크게 달라진 점은 마음가짐인 듯 보였다.
“스쿼시는 나의 일부야.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
그런 동생의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기꺼이 땀을 흘리러 가는 이유를.
그것은 단순히 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체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흔히 본캐(본업)가 중요하고 부캐(취미)는 덤이라 말한다.
안정감이 있어야 여유도 즐길 수 있기에 본업이 우선이라고 여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동생을 보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본캐를 버티게 하는 힘은, 어쩌면 부캐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살다보면 종종 뜻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 찾아온다.
애써 준비한 일이 허무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별것 아닌 한마디에 자신감이 무너지기도 한다.
자신이 그저 회사의 작디작은 부품처럼 느껴지는 날.
만약 자신을 회사원이라는 역할 하나로만 바라본다면,
그런 하루는 곧 나 자신의 실패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
실수한 날에도, 마음이 무거운 날에도, 울고 싶은 날에도,
코트 안에서는 여전히 공을 쫓아 달릴 수 있었다.
회사원으로서의 하루가 잠시 흔들리더라도
스쿼시를 하는 자신까지 함께 흔들리지는 않았다.
나 역시 요즘 밤마다 트랙을 가볍게 뛰고 있다.
그저 하루 동안 복잡해진 생각들을 정리하고,
가라앉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띄우기 위해 시작한 뜀이었다.
하지만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이상하게도 하루가 조금 가벼워졌다.
생각해 보면 동생이 스쿼시를 계속 하는 이유도,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하루가 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을 향해 움직이는 동안만큼은
스스로를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되니까.
어쩌면 부캐란 지친 마음을 잠시 기대어 둘 버팀목 같은 곳이 아닐까.
마우스를 내려놓고 라켓을 쥔 동생처럼,
나 또한 오늘도 러닝화를 고쳐 신는다.

<화분> Vol.71
에디터 ***
포토그래퍼 ***